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정상에 도전하는 피크 등반가들의 베이스캠프는 아니다. 트레킹족들을 위해서 전망과 편리한 등반로를 고려해 만들어진 별도의 캠프다. 때문에 누구나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다.
촘롱을 지나 시누와에서 1박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조금 서둘러 출발한다. 밤부(2340m), 도반(2600m), 히말라야 호텔(2900m)과 힌쿠 케이브(Hinku Cave, 3000m)를 거쳐 데우랄리(Deurali, 3200m)에서 1박을 하는 일정이다. 시누와에서 출발해 윗 시누아(Upper Sinuwa)까지는 급격한 오르막이다. 윗 시누와 롯지에 오르면서 또다시 오른편 대각선 방향으로 마차푸차레를 마주한다. 윗 시누와의 내리막길 이후부터는 대나무 군락지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호대들이 계곡을 따라서 가득 차 있다. 대나무 군락지는 밤부와 도반을 지나서도 계속된다. 때문에 밤부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밤부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눈발이 거세진다. 날씨가 흐려지면서 주위 조망이 어려워진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만 우렁찰 뿐 계속 보며 걷게 된다는 마차푸차레도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돌계단의 오르막을 지나면 힌쿠 케이브다. 동굴이 아니라 드넓은 바위 아래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밤부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을 생츄어리(Santuary) 코스라고 부르며 신성시하고 있다. 그래서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등 육류 음식의 반입이 금지된다. 당연히 시누와 이후의 롯지에서는 육류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다만 생선류는 가능하다고 한다. 데우랄리 롯지에 도착하니 지붕마다 눈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 어렸을 때 보았던 시골 마을의 정취가 그대로 느껴진다.
데우랄리에서 MBC를 거쳐서 ABC에 이르는 일정이다.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니 비교적 날씨가 맑은 편이다. 멀리 구름이 끼어 있지만 시야는 양호하다. 왼편 계곡을 끼고 2시간 정도 걷다 보니 구름이 밀려오면서 시계제로가 된다. 왼편으로 빙하가 나타나고 오르막이 계속된다. 눈보라가 몰아치면서 지척에 보여야 할 마차푸차레가 구름에 갇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리는 눈 속에 살포시 모습을 드러낸 오른편 산군들의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 같다. MBC에서도 마차푸차레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맑은 날씨라면 마차푸차레는 물론 강가푸르나, 히운출리의 모습도 선명하게 드러날 텐데 아쉬울 뿐이다.
조금 서둘러서 ABC로 향한다. ABC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인데 고도가 높아지면서 속도가 느려진다. 오르는 길에 거센 눈보라가 계속해서 얼굴을 강타한다. 지루하고 힘든 오르막의 연속이다. 이리저리 사진을 찍어도 하얀 눈으로 뒤덮인 백설기 한판뿐이다. 당연히 마차푸차레도 안나푸르나도 눈보라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 며칠 전부터 눈보라가 있을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막연하게 그동안 트레킹에서 경험했던 나의 운을 믿으면서. 거의 3시간을 걸어서 ABC에 도착한다. 눈이 아침까지 계속 내리면 산장에서 2~3일 고립될 수도 있고 헬기로 하산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는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푼힐에서 일출과 일몰을 모두 경험한 것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희망을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ABC에 도착한 일행들이 함께 모여 박영석 대장 등을 추모하기 위해 추모탑에 들른다. 그들이 그토록 좋아했을 소주와 육포를 올리면서.
방에 전등도 켜지지 않고 통신도 모두 끊겨 8시경 잠자리에 들었다가 12시경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아뿔싸, 그토록 거세던 눈발이 조용해지고 밤하늘에 별이 초롱초롱하다. 혹시나 하고 안나푸르나 방향을 항해 고개를 돌려보니 거대한 산군들이 위용을 자랑하며 늠름하게 서 있다. 날씨가 바뀌면서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가 제자리에서 우뚝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고요한 날씨에 안나푸르나 산군들이 동네 뒷산처럼 둘러싸여 있다. 거대한 8000m급의 산이 아니라 금방 오를 수 있는 우리네 산들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일출이 시작되면서 산 정상부터 빨갛게 물들어 간다. 직접 그런 모습을 보는 감격이라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아침을 먹고 다시 한 번 주변의 산군들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자리를 떠야 하는 아쉬움에 계속해서 눈길이 간다.
MBC 방향으로 내려가는 하산길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코스다. 어제는 눈보라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걸었는데, 오늘은 사방에 늠름하고 당당한 산군들의 모습이 보인다. 안나푸르나 남봉, 주봉, 강가푸르나와 마차푸차레, 그리고 오른편으로 히운출리까지 보고 또 보아도 경이로운 광경이다. MBC에서 강가푸르나와 마차푸차레, 그리고 글래셔 돔을 보고 나서 계곡길로 접어든다. 안나푸르나 산군들이 쏟아내는 빙하와 눈이 녹은 물이 계곡 왼편으로 우렁차게 흐른다.
데우랄리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나니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눈발이 거세고, 조망이 사라진다. 눈보라가 날리는 산길을 걷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다. 옷과 신발이 젖는 것을 제외하고는. 밤부에서 시누와 아래까지는 대나무 군락지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대나무들이 길 주변에 내려앉아 길을 가로막고 있다. 서둘러서 걸으면서도 주변 경관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비옷을 입은 데다 눈 때문에 길가에 내려앉은 대나무들로 하산길이 지체된다. 한겨울이 지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제대로 맛보지 못한 눈 산행을 머나먼 네팔에서 즐기고 있는 모습이라니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트레킹 마지막, 밤부에서 시누와를 거쳐 촘롱, 그리고 지누단다(1780m)로 하산해 점심을 해결한 다음 300m가 넘는 출렁다리(New Bridge)를 건너 머큐(1680m)까지 걷는다. 머큐에서 지프를 이용해 시와이(Siwai, 1380m)를 거쳐 나야풀에 도착해 버스로 갈아타고 포카라로 돌아오는 코스다. 아침에 일어나니 날씨가 화창하다. 며칠 동안 변덕스러운 날씨를 경험했는데, 이곳은 고도가 낮아서인지 고요하다. ABC에 오르면서 한참을 쉬어갔던 촘롱도 오늘은 가볍게 지나친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왼편이 지누단다로 하산하는 길이다. 숨을 헐떡이면서 올라오는 어린 학생들 무리가 경주에서 온 고등학교 입학생들이란다.
갈림길에서 지누단다로 내려가는 길은 1시간 정도 걸리고, 무릎에 무리가 갈 정도의 급경사 길이다. 치악산의 사다리병창길, 화엄사에서 성삼재 올라가는 코재, 설악폭포에서 대청봉에 오르는 길보다 더 급경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때에는 꼭 스틱을 이용해야 하는데 빈손으로 내려가느라 무척 고생을 한다. 지누단다에서 조금 내려오면 거대한 출렁다리가 기다리고 있다. 300m 가량의 계곡을 건너는 다리다. 지금까지 몇 번 경험했던 출렁다리와는 규모가 다르다. 지프와 당나귀 때들이 뒤엉켜 있는 마큐에서 미리 준비된 지프를 타고 시와이를 거쳐서 나야풀까지 간다. 나야풀에서 다시 2시간 가까이 버스로 비포장도로를 달려 포카라로 돌아와 염소 수육으로 저녁을 하면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와 푼힐 전망대의 트레킹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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