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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반 초기 역사의 오해와 진실(행정고시반 3) 2023-07-18 13:41:45
작성자  총동문회 webmaster@hanyangi.net 조회  763   |   추천  161

고시반 초기 역사의 오해와 진실(행정고시반 3)

이종정 정부혁신정책연구소장/전 국가보훈처 차장



 

*본보는 고시반 역사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기 위해 행정고시반에서 공부하고 국가보훈처 차장을 지낸 이종정 동문의 글을 게재한다. 지난 5~6월호에 이어 세 번째 글이다.


한양대 고시 개화기 시대를 열다

우리는 당시 고시 합격한 후에 김연준 이사장님을 한번 찾아뵐 수 있었다. 학장님 인도 하에 뵈었을 때 고개를 끄덕이시던 모습이 새삼스럽다. 나는 국가보훈처 차장(2009)으로 공직을 마감하고,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2013)을 지낸 이후 모교의 공공정책대학원에서 특임교수로서 복지정책을 강의하고, 한편으로는 정부혁신정책연구소장으로 학계와 관계의 여러 선후배들과 연계하여 공공정책연구를 통해 보다 더 실용적인 한양의 학풍에 일조코자 하였다. 한양의 인연이 참으로 질기다는 느낌을 갖는다.

국가보훈처 공무원의 길로 들어서고, 국비 해외 유학과 행정 선진화와 국제화에 앞장서다

개인적인 공직 경험을 얘기해보면 행시 합격 이후 영덕군청 수습 생활을 끝내고, 의가사 군복무를 짧게 마치고, 국가보훈처(당시 원호처)로 첫 발령을 받으며 1978년부터 본격적인 공직을 시작했다. 당시 암으로 투병하셨던 부친과도 이별했고, 적응난을 겪고 있었는데 공무원 해외교육훈련제도가 도입되면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원 석사과정으로 유학가게 된다.

 

정부 내에서 영어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야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육 과정을 수료하였다. 1979년 아마 우리 대학 출신 공직자로는 최초로 해외 유학을 가게 된다. 미국 듀크대 박사 출신인 이선환 교수의 추천을 받으면서 듀크대 인근의 UNC로 가게 된다. 당시 미국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격차감은 지금 후진국에서 우리나라 대학에 유학을 온 학생들이 우리나라 모습을 보는 느낌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공부 외에도 선진문화를 두 눈으로 보고 배우면서 국가발전을 견인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후 보훈처 내에서도 행정 선진화와 국제화에 앞장서 왔다고 생각한다. 1981년 귀국하니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1983년 결혼, 1982~1983년 영국 척수장애 제대군인 선수들과 함께 영국 휠체어국제체육대회 임원 참가, 이후 ICC임원회의에 참가해 88장애인올림픽을 우리나라로 유치토록 제안하여 이를 성사시킨 것이 공직생활 중 큰 보람으로 기억된다.

 

당시 에리카캠퍼스가 본격화되면서 상대에 주 1회 출강하는 등 바쁜 사무관 생활을 마감하고 서기관 진급과 동시에 대구지방보훈청 부청장(지도과장)으로 1년 6개월 근무 후 처본부로 복귀했다. 추후 대통령 직속 21세기위원회 행정실장으로 파견됐고 이후 천안보훈지청장, 기획예산담당관, 국장급 승진 이후 공보관을 거쳐 1998년부터 1년간 미국 아메리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파견 근무하면서 미국 보훈부 본부에서 3개월간 연수도 하고 비교적 자유스러운 기간을 보내게 된다. 귀국 이후 제대군인정책관, 기획관리관의 본부 국장 생활을 했고, 그중 부산지방보훈청장으로의 1년은 특히나 의미가 있었다.

부산지방보훈청장 시절 동문회 활동에 눈뜨다

아무래도 지방 기관장은 시간이나 활동의 폭에서 재량권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마침 부산동문회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고, 손용근 선배가 부산에 재직하며 동문회 활동에 열심이던 중 호출을 받아 참가해보니 72학번의 권선홍 교수(부산외대 교수, 외무고시 합격 후 교수로 전직)와 후배 법조인들뿐만 아니라 故양성민 회장(당시 부산동문회장, 조광페인트 회장), 부산시의회 권영적 의장님 등 부산의 지도층 인사이셨던 동문 선배님들과도 많은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박혁진 부산조달청장, 서태경 부산고검 부장 등 고시반 동기가 같은 시기 부산에서 근무하였고, 주요 공직기관에 있었던 선후배들(정의택 선배, 故박일만 선배, 조경주 선배 등)과도 정기적인 교류를 가졌던 기억은 항상 새롭다.

 

개인적인 교류뿐만 아니라 기관의 문제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故양성민 회장님은 특유의 넉넉한 인품과 열의로 부산동문회를 이끄시면서 지역 동문들에게 참으로 많은 인정을 베푸셨고 동문의 정을 느끼게 해주셨던 분이다. 뜻밖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양 회장님의 명복도 빈다. 어쨌든 나로서는 한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 시기를 거치면서 굳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6·25전쟁 5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6·25 참전국 중 부산에 기념비를 두고 있는 의료지원국(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이태리) 참전 노병을 초청하여 태종대 앞의 기념비에서 참전기념행사를 주관하고, 영도 목장원 음식점 마당에서 바다를 보며 위로 오찬을 주관한 일들은 여전히 기억이 새롭다.

국가보훈처 기획관리실장 지내며 국회, 언론계 동문들과 협력관계를 넓히다

2001년 8월 이후에는 처본부에서 기획관리실장, 보훈심사위원장, 차장을 거치면서 보훈사업의 인프라를 새롭게 구축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도 보훈을 통한 국제협력 강화 등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지나고 보면 역동적인 10년을 보낸 것 같다. 국립묘지법 제정, 독립기념관 이관인수, 6·25전쟁 60주년 기념 범정부사업 총괄기획 추진 등 타 부처와 국회 등 협의가 필수적인 많은 일들을 진행했고, 두 분 대통령 교체 시기에 정부 인수 문제 등 힘들고 새로운 일들을 겪었다. 자연스레 국회의원, 국회의원 보좌관 후배들과 언론사의 선후배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를 살펴봤을 때 언제부터인가 윗사람은 안보이고 아랫사람이 많아져 큰일이 생길 때마다 윗분들에게 물어보기보다는 내가 방향을 잡고 끌고 나가야 할 위치에 서 있는 자신을 대하면서, 비로소 국가공무원으로의 책무와 운명적인 현실을 인식하기도 했다. 약 2년간의 공백을 거친 이후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국가보훈처 공직 후배들의 격려와 성원과 한양대 동문의 지지 덕분에 이명박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 개인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보훈공단 이사장 취임하기 직전에 안양천변 산책 중 후면 충돌(인라인스케이트) 사고로 경추 디스크 파열상을 입고도 수술 이후 거의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할수 있게 된 것도 천운이면서 많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기도 했다. 당시 병상에 누웠을 때 다시 한번 활동할 수 있게 된다면 그야말로 제2의 인생을 자유롭게 펴나가 보자고 했었는데 그 다짐이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국가보훈처 공무원 생활은 쉽지 않다. 부처 권한이나 위상이 낮아서 정부 내에서도 목소리 내기도 어려워 정책사항으로 내려오는 사항이 아니면 부처간의 벽을 넘기가 벅찬 법이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새롭게 선구적으로 길을 열어나가는 자세로 임했던 것으로 위안을 삼아본다. 금년 7월부터 국가보훈부로 승격되어 정부 내 아홉번째 부서로 자리잡아 보훈정책이 국정 고유가치로 자리매김되는 것 같아 참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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